둘리 신분증으로 전자담배 자판기 뚫렸다…서울시 테스트 결과 40%가 성인 인증 무력화

2026년 07월 03일

둘리 가짜 신분증 전자담배 자판기

‘둘리 신분증’이 통과시킨 자판기

서울 중구의 한 지하철역에 설치된 전자담배 자동판매기. 이곳에 만화 주인공 ‘둘리’의 얼굴이 붙은 플라스틱 카드를 넣자 기계는 곧바로 “성인 인증이 완료됐습니다”라는 안내음을 내보냈다. 이름은 ‘둘리’, 생년월일은 ‘1983년 4월 22일’, 주소는 ‘부천시 원미구 둘리의거리’ — 누가 봐도 가짜임이 명백한 정보였지만, 결제가 이뤄지고 액상형 전자담배가 배출됐다. 이 카드는 서울시가 성인 인증 실태를 점검하기 위해 직접 제작한 것이다. 주민등록증과 동일한 크기의 플라스틱 판에 둘리 그림을 붙이고 엉터리 개인정보를 기입했지만, 자판기는 단 한 번의 저항도 없이 이를 진짜로 받아들였다.

서울시가 지난 4월부터 6월까지 서울 시내 전자담배 자동판매기 415대를 대상으로 둘리 신분증을 포함한 가짜 신분증 5종을 투입해 테스트한 결과, 168대(40.5%)가 이들 가짜를 걸러내지 못했다. 특히 122대는 5종의 가짜 신분증을 모두 진짜로 인식하는 치명적인 오류를 드러냈다. 자판기 외부에 부착된 ‘신분증 도용은 평생 전과로 남습니다’라는 경고문은 무색할 따름이었다.

무인 모텔도 뚫렸다

문제는 전자담배 자판기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같은 날 서울시는 둘리 신분증을 들고 서울 광진구의 한 무인 모텔을 찾았다. 미성년자의 출입이 금지된 이 곳 역시 키오스크에 카드를 넣자 “투숙객의 성인 인증이 성공했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가짜 신분증 5종 모두 이 모텔의 인증 장벽을 단번에 넘어섰다. 무인 술집 등 청소년 출입이 제한된 다른 무인 점포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비용 절감이 부른 보안 공백

전자담배 자동판매기는 국민건강증진법에 따라 성인 인증 장치를 갖추도록 의무화되어 있지만, 구체적인 인증 수준에 대한 규정은 마련되지 않았다. 최경진 개인정보보호법학회 회장은 “행정안전부 전산망을 통해 신분증 진위를 실시간으로 확인하는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원칙이지만, 많은 업체가 비용 부담을 회피하기 위해 인증 수준이 낮은 방식을 선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일부 자판기는 생년월일 숫자만 성인 여부를 판별하는 단순한 알고리즘을 쓴다는 분석도 나온다. 또 다른 기기는 신분증의 크기와 글자·숫자가 소정의 위치에 배치되었는지만 스캔한다고 한다. 업계 관계자는 “정확한 성인 인증이 가능한 자판기는 일반 제품보다 200만원 가량 비싸다”며 “적발되어도 ‘무인 점포라 미성년자인 줄 몰랐다’고 해명하면 책임을 피할 수 있다는 인식이 퍼져 있어, 굳이 고가 장비를 도입할 유인이 적다”고 전했다.

SNS에서 불법 거래되는 신분증

가짜 신분증은 소셜미디어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실정이다. X(옛 트위터) 등에는 “10만원이면 실물 신분증 제작해 드립니다”, “원하는 이름, 주소, 사진으로 주문 제작 가능”이라는 게시물이 버젓이 올라와 있다. ‘신분증 판매소’, ‘신분증 제작 업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는 계정도 확인된다. 이들은 플라스틱 판에 글자와 숫자, 사진을 인쇄한 비닐을 입혀 마치 진짜와 유사한 외형의 카드를 만들어 낸다. 더 간단한 방법도 있다. 인터넷 검색만으로 주민등록증 견본 이미지를 쉽게 찾을 수 있고, 이를 포인트 카드 등에 출력해 붙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고등학생 최모(17)군은 “요즘 편의점에서 담배 때문에 실랑이할 일이 전혀 없다. 가짜 주민등록증 하나면 전자담배 자판기를 그냥 통과할 수 있다”고 털어놨다. 청소년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뚫리는 자판기’ 정보가 공유되고 있다는 후문이다.

청소년 전자담배 사용률, 처음으로 일반 담배 추월

이런 배경 속에서 질병관리청의 ‘청소년건강행태조사’ 결과는 우려를 더한다. 지난해 기준 청소년의 전자담배 사용률은 2.4%로, 일반 담배 흡연율(2.2%)을 사상 처음으로 앞질렀다. 청소년 사이에서 전자담배 접근성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는 방증으로 읽힌다.

서울시, 제도 개선 건의…실효성은 숙제

조영창 서울시 시민건강국장은 “성인 인증 시스템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업주에게 과태료를 부과할 수 있도록 보건복지부에 제도 개선을 건의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규정의 빈틈과 낮은 처벌 수위가 반복되는 한, 만화 캐릭터 신분증이 진짜 신분증처럼 통용되는 아이러니한 현실이 당분간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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