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록, 한국·대만 AI 공급망 ‘집중 리스크’ 이유로 비중 축소…미국은 낙관 유지 ‘이중 기준’ 논란
2026년 07월 01일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블랙록이 한국과 대만 주식에 대한 투자 의견을 종전 ‘비중 확대’에서 ‘중립’으로 한 단계 내렸다. 이 회사는 그 배경으로 인공지능(AI) 가치사슬의 집중 위험을 꼽았다. 여러 시장이 동일한 AI 공급망에 연결되어 있다면, 지리적으로 흩어져 있어도 위험이 줄어들지 않는다는 논리다.
블랙록의 판단은 표면적으로는 위험 분산 차원에서 나온 전략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작 같은 보고서에서 미국 증시에 대해서는 여전히 낙관적인 시각을 유지했다는 점이 눈에 띈다. 한국과 대만은 AI 공급망 집중이라는 이유로 비중을 낮춘 반면, 미국 기술주는 AI 투자 기회로 분류한 것이다. 같은 AI 산업을 두고 생산 인프라를 보유한 국가에는 위험 프리미엄을, 미국의 플랫폼·소프트웨어 기업에는 성장 프리미엄을 적용한 셈이어서 이중적인 태도라는 비판이 나온다.
“월가의 러다이트 본색 드러났다”…생산 인프라를 위험으로 규정
일각에서는 블랙록의 이 같은 행보를 두고 ‘러다이트(Luddite)’ 본색이 드러난 것이라는 분석도 제기된다. 19세기 산업혁명 당시 기계 파괴 운동을 벌였던 러다이트가 기계의 등장을 위협으로 본 것처럼, 오늘날 월가가 미국 밖에서 형성되는 AI 생산 인프라를 위험 요소로 규정하고 있다는 해석이다. 한국의 HBM, 대만의 파운드리·첨단 패키징, 데이터센터, 전력망 등이 AI 시대의 핵심 생산수단으로 부상하자, 이를 새로운 성장 축이 아니라 집중 리스크로 포장하는 방식이라는 지적이다.
블랙록의 논리는 월가가 여전히 AI 산업을 미국 중심의 플랫폼 서사로 읽고 있음을 시사한다. 한국과 대만은 반도체·메모리·파운드리·패키징을 공급하는 하부 생산망으로, 미국은 AI 수익을 거둬가는 상부 플랫폼으로 구분하는 구조다. 그러나 AI 시대의 진정한 희소성은 소프트웨어보다 GPU, HBM, 첨단 패키징, 데이터센터, 전력망 같은 연산 인프라에 있다는 점을 간과했다는 반론이 힘을 얻고 있다. 이들은 단기간에 복제하기 어려운 물리적 자산이기 때문이다.
“집중 위험”이 곧 전략적 가치…한국·대만의 협상력 주목
블랙록이 집중 위험이라고 부른 지점은 오히려 한국과 대만의 전략적 가치를 증명한다는 견해도 있다. 대만은 TSMC를 통해 전 세계 AI 가속기 로직 생산의 핵심 축을 장악하고 있고, 한국은 HBM과 메모리 대역폭에서 AI 연산의 병목을 쥐고 있다. AI 투자가 장기화될수록 가장 높은 협상력을 가질 가능성이 있는 쪽은 추상적 소프트웨어 기업이 아니라 물리적 연산 능력을 실제로 생산하는 국가라는 주장이다.
업계 관계자들은 “블랙록의 의사 결정이 단순한 리스크 관리를 넘어선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AI 생산능력이 미국 밖으로 다극화되는 흐름에 대한 월가식 방어 논리라는 것이다. 미국 플랫폼 기업에는 미래 성장 프리미엄을 붙이고, 그 플랫폼을 실제로 작동시키는 한국·대만 생산 인프라에는 위험 프리미엄을 부여하는 이중 구조는 기술 발전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금융 패권 질서를 유지하려는 러다이트적 반응에 가깝다는 분석이다.
마이클 버리의 행보와 맞닿은 월가의 이중성
월가의 이런 이중적 행태는 유명 투자자 마이클 버리의 최근 행보에서도 드러난다. 버리는 한국의 대규모 반도체 투자를 AI 랠리의 원인으로 지목하며 ‘종말의 시작’이라는 발언을 내놨지만, 정작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직접 겨냥한 공매도 포지션은 확인되지 않았다. 그의 발언은 한국 생산 인프라를 향했지만, 실제 베팅은 엔비디아와 캐터필러, 반도체 ETF(SOXX) 등 미국 AI 생태계에 집중된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과 대만의 생산층은 위험으로 규정하면서, 미국 시장에서는 그 위험 서사를 주가 하락 베팅의 근거로 활용하는 꼴이다.
블랙록의 결정이 미국 기술주가 AI 수혜를 받는다는 판단 자체가 틀렸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한국과 대만 생산체계를 위험으로, 미국 빅테크 생태계를 기회로 나누는 방식은 낡은 금융 문법에 갇힌 결과라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는다. 월가는 미국 기술주를 통해 AI 수익을 사고 싶어 하지만, 그 수익의 물리적 기반은 한국과 대만의 실리콘 위에서 만들어진다. 결국 AI 시대의 승자는 금융 서사를 잘 쓰는 쪽이 아니라, 실물 연산 인프라를 확보하고 확장할 수 있는 쪽일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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