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현아 교수가 본 월드컵: 약소국 카보베르데·코트디부아르의 반란
2026년 07월 03일

서울대 명예교수 양현아는 2026년 북중미 월드컵을 단순한 스포츠 이벤트로 보지 않았다. 그가 가장 주목한 것은 전통적 강호들을 압박한 신생 출전국들의 존재감이었다. 특히 서아프리카 해안에서 떨어진 10여 개 섬으로 이뤄진 인구 50여만 명의 카보베르데는 스페인과 0대0 무승부를 거두고, 남미의 강호 우루과이를 상대로 2대2로 비기며 전 세계 축구 팬들을 놀라게 했다. 마흔 살의 노장 골키퍼 보지냐의 선방은 큰 화제를 모았고, 포르투갈 식민 지배를 받다 1975년 독립한 이 작은 나라의 존재감은 월드컵을 통해 확실히 각인됐다. 코트디부아르 역시 전통적 강호 독일을 2대1로 맞서 선전했고, 에콰도르를 1대0으로 제압하는 저력을 발휘했다. 이 나라가 ‘아이보리코스트’라는 식민지적 명칭 대신 프랑스어 국명 ‘코트디부아르’를 고집하며 정체성을 분명히 한 점도 인상적이었다.
양 교수는 48개국이 출전한 이번 월드컵의 예선전에서 일방적인 경기를 찾아보기 어려웠다고 지적했다. 잉글랜드와 가나, 벨기에와 이란이 각각 0대0으로 비긴 것도 같은 맥락이다. FIFA가 예선 참가국을 확대한 배경에는 비즈니스적 계산이 깔려 있다는 분석도 있지만, 그 결과물인 “다양성의 돌풍”은 단순한 스포츠를 넘어 세계 정치지형의 변화를 암시한다는 평가다. 양 교수는 “축알못”을 자처하면서도 거실에서 월드컵을 통해 만난 “세계와 세계인들”이 평탄한 운동장의 구성원이 아니라, 식민후기의 복잡한 역사를 지닌 약소국 출신임에 주목했다.
남태령의 밤, 가장 사적이고 정치적인 연대
양 교수는 지난 6월 관람한 다큐멘터리 ‘남태령’(김현지 감독, 2026)에서 또 다른 종류의 ‘돌풍’을 목격했다. 2024년 12월22일 남태령 현장을 기록한 이 작품은 전농 전봉준 투쟁단이 윤석열 구속과 양곡법 개정을 촉구하며 트랙터 행진을 벌이다 경찰의 봉쇄에 부딪힌 사건을 다룬다. 시위 농민에 대한 구타 장면이 소셜미디어 엑스(X)를 통해 확산되자, 주 이용자층인 2030 여성들이 현장으로 몰려들었다. 양 교수는 머릿수 하나라도 보태려는 마음에 달려갔지만, 오히려 얻은 것이 더 많았다고 회고했다.
현장에서는 30~40미터 길게 늘어선 즉석 자유발언대가 운영됐다. 참가자들은 3분짜리 발언 기회를 얻기 위해 줄을 서면서도,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공개하는 것으로 발언을 시작하는 등 이전에는 보도나 전례를 찾기 어려운 “가장 사적이고 정치적인”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한 농민 아저씨가 “딸들 수고했어”라고 인사하자, 논바이너리 참가자들은 “우리는 딸들 아니에요”라고 정정했고, 농민은 “그렇구나. 알아두겠다”고 화답했다. 2030 세대가 들어본 적 없는 농민가 ‘삼천만 잠 들었을 때 우리는 깨어…’가 현장에서 전수됐고, 후렴마다 ‘윤석열 탄핵’ 구호가 붙어 운을 맞췄다. 양 교수는 이 장면들을 두고 “K-문화 시위”라고 명명했다.
말벌동지의 진화, 새로운 사회운동의 가능성
남태령 시위를 계기로 결성된 ‘말벌동지’는 이후 동덕여대 시위, 장애인 이동권 시위, 조선업 하청노동자 운동 등으로 유기체처럼 확장되고 진화했다. 양 교수의 시선을 가장 끈 것은 대구 지역 성소수자 멤버들의 인터뷰였다. 김현지 감독이 “새로운 이야기는 늘 변방에 있다”고 말한 것처럼, 지역·젠더·성적 정체성이 교차하는 지점에 선 이들은 자기 터전을 스스로 개척하는 실천을 보여줬다. 양 교수는 이같은 흐름이 얼마나 많은 지지와 변화를 이끌어냈는지, 6·3 지방선거 결과에 어떻게 반영됐는지를 반문했다.
다큐멘터리는 동시대 소셜미디어 메시지들을 화면에 띄우는 방식으로 당시의 담론과 지지의 역동성을 생생하게 재현했다. 양 교수는 자신이 현장에 있었음에도 당시 오고 간 메시지들의 전모를 알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그가 “진정 ‘있었던가’를 묻게 된다”고 술회한 대목은 이 불꽃 튀는 담론장이 있었기에 ‘그날의 대첩 승리’가 가능했다는 감사와, 자신의 뒤처짐에 대한 반성이 뒤섞인 표현이다.
‘K-새로운 사회운동’의 교훈
양 교수는 한국의 많은 엘리트들이 ‘남태령’을 보기를 권한다. 탈위계적 소통을 생명으로 삼고 새로운 언어와 문화를 창조하는 이른바 “케이-새로운 사회운동” 속에서 이들은 분명 영감을 얻을 것이라고 말한다. 월드컵의 ‘약소국 돌풍’과 남태령의 ‘연대의 폭발’은 겉보기에는 전혀 다른 영역의 사건이지만, 양 교수의 시선은 이 둘을 관통하는 메시지를 읽어냈다. 기존의 권위와 질서를 해체하고 다양성을 수용하는 태도가 개별 운동을 넘어 사회 전체의 변화 동력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다만 이러한 ‘변방의 목소리’가 기성 정치 구조 내에서 실제 정책이나 의사결정으로 연결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월드컵의 이변처럼, 한국 사회 운동의 지형도 예측 불가능한 경로를 따라 흐르고 있다. 그 흐름이 어디로 향할지, 향후 몇 년간의 행보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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