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인프라 투자, ‘칩 쟁탈전’ 넘어 ‘생산 능력 확장전’으로… AI CAPEX 2.0 시대
2026년 07월 01일

인공지능(AI)을 둘러싼 글로벌 자본 경쟁이 한 단계 더 격화되고 있다. 초기 단계가 GPU와 고대역폭메모리(HBM)를 확보하기 위한 ‘칩 쟁탈전’이었다면, 지금은 칩 공급 병목을 해소하기 위해 생산 설비 자체를 증설하는 ‘생산 능력 확장전’으로 성격이 바뀌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업계 일각에서는 이 흐름을 ‘AI CAPEX 2.0’으로 지칭하며, 과거 중국이 제조업 부문에 막대한 자본을 쏟아부어 생산비를 낮췄던 방식과 유사한 ‘생산요소의 대이동’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AI가 ‘저렴한 지능’이라는 무형의 혁신을 만들어내지만, 그 기반이 되는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공장은 어마어마한 유형자산 투자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특히 주목할 점은 투자 대상이 크게 넓어졌다는 사실이다. 과거 범용 메모리 시대와 달리, AI 반도체는 미세공정 전환, 메모리 적층, 첨단 패키징 기술이 결합되면서 웨이퍼 한 장에 들어가는 공정과 장비 수가 급증했다. 이에 따라 증착·식각·검사·본딩 장비뿐 아니라 기판, 절연재, 클린룸, 전력 설비에 이르기까지 수혜 범위가 전방위로 확산되고 있다. 이런 흐름을 두고 ‘AI 팹 골드러시’라는 표현이 등장한 배경이다.
빅테크·삼성·하이닉스, 천문학적 자금 투입
미국 4대 빅테크로 꼽히는 마이크로소프트, 알파벳, 아마존, 메타의 올해 합산 설비투자(CAPEX)는 7250억 달러(약 1113조 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지난해 4100억 달러보다 77%나 증가한 사상 최대 규모다. 월스트리트저널(WSJ)과 파이낸셜타임스(FT) 등 외신이 인용한 수치로, 빅테크의 AI 인프라 투자가 얼마나 가파르게 늘었는지를 보여준다.
한국 기업들의 투자 행보도 만만치 않다. 기업데이터연구소 CEO스코어에 따르면, 지난해 삼성전자는 설비투자 52조1531억 원, 연구개발(R&D) 37조7404억 원 등 총 89조8935억 원을 반도체 분야에 쏟아부었다. 이는 글로벌 반도체 10대 기업 가운데 단연 1위로, 2위인 대만 TSMC(69조4109억 원)와도 20조 원 이상 차이가 난다. SK하이닉스도 35조450억 원으로 4위에 올랐다. 여기에 더해 두 회사는 호남·충청권에 반도체 클러스터를 조성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며, 투자 규모는 수백조 원대에 이를 것으로 전해진다. 흥미로운 점은 전공정(前工程)과 후공정(後工程)을 한 곳에 함께 배치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소부장 산업, 무차별적 수혜 예상
이 같은 설비투자 사이클이 가속화하면서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업계에도 거센 파도가 밀려오고 있다. 반도체 산업은 공정별로 업황을 체감하는 시점이 제각각이다. 메모리 가격이 오르고 수요가 폭증해도 반도체 기업이 바로 생산 능력을 늘리기 어렵기 때문에, 초기에는 기존 설비 가동률을 높이는 방식으로 대응한다. 이후 불량 검사나 패키징을 담당하는 후공정 업체가 먼저 낙수효과를 누리고, 전공정 소부장 업체는 신규 팹 투자가 결정되고 장비 발주가 이뤄져야 수혜를 볼 수 있다. 하나증권 김록호 애널리스트는 “대부분 장비 업체가 이번 설비투자 사이클의 수혜를 무차별적으로 받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실제로 지난 2년간의 투자는 기존 D램 생산라인 일부를 HBM용으로 전환하는 ‘전환 투자’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AI 가속기와 차세대 HBM을 생산하기 위해 완전히 새로운 팹과 라인을 구축하는 ‘신규 증설’이 주를 이룬다. 이에 따라 증착, 식각, 세정, 검사, 본딩 장비가 대규모로 새로 발주될 수밖에 없다. 더불어 전공정에서 주로 사용되던 식각·증착·정밀 검사 기술이 후공정으로 확장되는 ‘후공정의 전공정화’ 현상도 장비 시장의 외연을 넓히는 요인으로 꼽힌다.
CAPEX 2.0의 세 가지 특징과 향후 전망
전문가들은 이번 ‘AI CAPEX 2.0’ 국면이 과거 반도체 설비투자 사이클과 세 가지 측면에서 뚜렷이 구분된다고 진단한다. 첫째, 투자 성격이 ‘전환’에서 ‘신규 증설’로 바뀌었다. 둘째, 생산량 증가뿐 아니라 미세공정·HBM 적층·TSV·하이브리드 본딩·첨단 패키징이 맞물리면서 공정 수와 장비 투입량 자체가 늘어나는 구조적 성장이 일어난다. 셋째, HBM 이후 병목이 패키징·기판·테스트로 확산하면서 후공정 업체가 ‘재발견’되고 있다는 점이다. AI 가속기는 HBM 적층, 칩렛(Chiplet) 조립, 2.5D·3D 패키징, 고성능 기판, 테스트 공정이 모두 필요하기 때문에, 후공정 분야의 중장기 수혜가 기대된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이 거대한 투자 흐름 속에서 한국 반도체 생태계가 ‘글로벌 리더’ 자리를 굳히려면, 단순히 메모리 반도체의 생산 능력만 키울 것이 아니라 소부장 산업의 경쟁력을 함께 끌어올리는 전략이 절실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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