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야 전시, 원화 대신 판화에 관람객 ‘실망’…거장의 이름값도 통하지 않았다
2026년 07월 03일

‘스페인의 거장 고야’라는 타이틀은 분명 강력했다. 지난달 26일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막을 올린 ‘스페인의 거장 고야: 이성이 잠들 때, 괴물이 깨어난다’전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고야의 작품을 대규모로 조망한다는 점에서 개막 전부터 큰 관심을 모았다. 스페인을 대표하는 화가의 생애를 아우르는 대표작과 화제작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슈퍼 얼리버드 티켓도 순조롭게 판매됐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자 상황이 달라졌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에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후기가 속속 올라왔다. 관람객들이 실제 전시장에서 마주한 건 그림보다 판화가 중심이 된 구성이었다.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나 ‘나체의 마야’ 같은 고야의 대표 회화들은 원본이 아닌 인쇄물과 미디어 영상으로 대체된 것. ‘원화가 온다고 홍보한 적 없다’는 전시 관계자의 해명이 나왔지만, 관람객들은 “전시 홍보 문구대로 고야의 일대기를 따라가며 그의 예술 세계에 몰입하기엔 부족했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좁은 공간에 빼곡한 판화, 동선까지 엉킨 불편함
관람 환경 자체도 호평을 받기 어려웠다. 크기가 작은 판화 작품 80점이 한 섹션에 밀집 배치되면서, 관람객이 몰리면 세밀한 감상이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전시 동선도 다소 난삽하다는 지적이 나왔고, 유료 오디오 가이드의 리스트가 작품 순서와 맞지 않아 오히려 혼란을 가중했다는 불평도 여러 건 제기됐다. 결국 유명 작가의 이름과 화려한 홍보 문구만으로는 관람객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어렵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난 셈이다.
이러한 현상은 단순히 이번 전시만의 문제가 아니다. 문화생활의 선택지가 과거보다 훨씬 다양해지면서, 관람객들은 더 이상 이름값에만 끌리지 않는다. 전시 산업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관람객이 전시장에서 실제로 무엇을 보고 느끼고, 누군가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느냐”가 흥행의 핵심 조건으로 자리 잡았다는 분석이 나온다.
‘공감’이라는 새로운 무기, 엔타쿠 전시의 파격
흥미로운 점은 같은 시기, 완전히 다른 전략으로 성공한 사례가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지난달 26일 서울과 부산에서 동시 개막한 ‘너무 착한데?’와 ‘틀린 건 아닌데’ 전은 도쿄 기반 크리에이티브 그룹 엔타쿠가 국내 마케팅 그룹과 손잡고 선보인 감정 체험 전시다. 이 전시에는 단 한 점의 유명 예술 작품도 포함되지 않았다.
대신 전시장을 채운 것은 일상 속 작은 선의와, 듣고 나면 어딘가 미묘한 감정이 남는 상황들이다. ‘너무 착한데?’ 전에서는 ‘챗GPT에게 존댓말 쓰는 사람’이나 ‘단톡방에서 제일 먼저 호응해주는 사람’ 같은 사소하지만 다정한 행동들이 조명된다. 반대편 ‘틀린 건 아닌데’ 전에서는 영화관 앞에서 “다음 달이면 OTT에 올라오는데”라고 말하는 상황처럼, 논리적으로 틀리진 않지만 찜찜함을 유발하는 장면들을 선보인다.
10만 ‘좋아요’를 얻은 문, 그리고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의 위로
이 전시의 가장 큰 힘은 ‘공감’이다. 특히 ‘갑자기 방문이 열린 사춘기 자녀’라는 문구가 적힌 문을 열면 그 상황 속 인물을 직접 마주하는 체험형 콘텐츠는 SNS에서 10만 개가 넘는 ‘좋아요’를 기록하며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이 전시는 2023년 일본에서 처음 시작됐지만, 한국 관객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에피소드와 표현으로 재구성해 더욱 현지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방문객들은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싶어 위로가 된다”거나 “이야깃거리가 많아 MBTI가 다른 친구와 가면 100% 의견이 갈릴 것 같다”는 후기를 남기며 입소문을 확산시키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전시 산업이 단순히 ‘보는 것’에서 ‘경험하고 공유하는 것’으로 중심축을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유명세는 여전히 관객을 전시장으로 이끄는 강력한 동력이지만, 최종 평가는 실제 관람 경험의 질이 결정한다. 앞으로 전시 기획자들은 작품의 권위보다 ‘관객의 시선’에 더욱 집중해야 할 시대가 온 것이다.
#전시산업트렌드 #고야전 #엔타쿠 #공감마케팅 #문화소비